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류철희

(대전가톨릭대학교 교리신학원 1기)

<1>

사제를 ‘또 다른 그리스도’라 하던가요? 신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영적으로 이끌어 주는 영적인 아버지가 사제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 신자가 된지 50년이 넘었지만 평신도로서 모시고 곁에서 지켜만 보았을 뿐 진정한 사제의 모습을 헤아릴 길 없는 제가 사제들 앞에서 ‘사제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분수에 맞지 않는다 여겨집니다.

저에게 주어진 주제가 「평신도에게 듣는다」이기에 제가 평소에 보고 느낀대로 진솔하게 얘기하려고 합니다. 귀에 거슬리고 선뜻 받아들이기가 거북한 내용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늘 겪어오는 것이지만 해마다 사제서품식과 첫 미사, 은퇴사제의 고별미사는 벅찬 감동과 끝간데없는 아쉬움을 안겨줍니다.

근년에 있었던 새신부의 첫 미사와 노사제의 은퇴미사에 참례하면서 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체험을 했습니다.

평범하게 보면 한 신원의 시작과 마침이라고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 신원이 ‘사제’이기에 아주 특별한 영상으로 제 머리와 가슴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1일 올해 서품된 새신부의 첫 미사가 출신본당에서 거행될 때 저는 천안 봉명동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했습니다.

거의 모든 첫 미사가 그러합니다만 새 신부를 신학교에 보내주신 아버지신부가 미사도 함께 집전하고 강론이나 축하의 인사를 통해 새신부의 앞날에 교훈이 될 만한 말씀을 남겨주십니다.

그날의 아버지신부는 안문기 신부님이셨습니다. 아주 짤막하면서도 무게를 가지고 하신 말씀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제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려면 복음 선포, 성사집행, 하느님백성의 지도 등 세 가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신부가 하는 일에 팔짱만 끼고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데는 먼저 앞장서고 성사를 집행할 때는 적극 참여할 것이며 백성을 지도할 때는 순명으로 따라야 합니다.”

<2>

저는 이 세 가지가 본당사제로서 마땅히 실행해 나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밖으로 나가 선교를 할 때는 신자들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성당 안에서의 강론이나 교육내용은 신부님이 철저하게 준비하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주일미사. 매일미사. 혼인미사. 장례미사 강론 준  비가 쉽지는 않겠지만 신부님들의 노력과 비례해서 신자들의 호응도나 참여도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의 참 뜻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론기법이나 예화, 체험을 적절하게 원용하는 방법도 연구하여 들려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여건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따지기에 앞서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연령, 계층, 성별, 생활상이 서로 다른 신자들을 상대로 기준을 맞추기가 어렵겠지만 같은 재료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부님들의 열성과 노력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성사집행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강론과 마찬가지로 성사집행도 신부님들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이 공급자이고 신자들이 수요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모든 사회적 흐름이 지난 날 공급자원칙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에 비춰 한번쯤 ‘수요자원칙’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은 그러하지 못하면서도 신부님들이 되도록이면 성당을 지켜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앙상담을 하고 싶을 때, 불현듯 고해성사를 보고 싶을 때(물론 각 성당마다 고해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서 신부님과 대화를 하게 되면 모두들 기뻐합니다.

신부는 공인이고, 신부도 사람인데 어떻게 늘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짜증스럽게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그리스도의 봉사를 따르겠다고 사제직에 불리움을 받았으니 ‘필요한 곳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주시기를 권합니다.

나를 내세우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곳에 사랑은 피어나고 평화는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3>

세 번째 덕목인 하느님 백성의 지도는 신부님들에게 가장 어려운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공동체라고는 하지만 순한 양이 아닙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순명을 입으로는 뇌이면서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뒷전에서 수군거리거나 헐뜯고 다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참여나 협조는 커녕 아예 팔짱을 낀 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활동은 하면서도 남보다 더 많은 눈길을 바라는 사람들, 시시콜콜한 일까지도 따지고 담비는 사람들...

정말로 다양한 계층, 성향이 다른 신자들을 한 마음 한뜻으로 묶어 나가기란 벅찬 일입니다.

조직관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많은 경험을 쌓을 기회도 적은 초임본당사제에게는 더욱 힘겨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가 되어 그들 하나하나를 끌어안고, 아우르며 나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론 당혹스럽고, 속이 답답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죄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마음으로 견디어 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당사제야말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다른 음색과 음량을 내는 ‘소리’들을 한데 엮어 멋진 화음을 이루도록 이끌어 가는 일이 바로 지휘자가 해 낼 몫입니다.

비교적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신자 열사람에게 어떤 본당사제를 바라는가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사제

-항상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사제

-신자들의 삶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하는 사제

-많은 신자들과 대화를 하고 특히 어려운 계층의 신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제

-검소하게 살면서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사제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사제

그들의 주문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대충 정리하면 위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끌어안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한사람 한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끌어안는다면 수많은 무리도 어렵지 않ㄱ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들에게 질문 하나를 남겨 둡니다.

“사목자로서 신자들의 밑바닥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의 삶에 모순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토스트에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여주인공 소냐가 성경을 읽으며, 찾아온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한 말 -비록 몸은 팔고 있지만 예수님을 잊지는 않고 있다-을 떠올리면서 이 물음을 거듭한다면 본당 사제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야고2,1)

<4>

본래 똥걸레로 섬겨야 하는 이름인데

귀신아비라니 잘못된 이름이지

검은 상복 속에 죽음을 살아야 하는 이름인데

이정(理情)에 꿈틀대니 잘못된 이름이지

또 다른 그리스도란 이름인데

땅에 매여 육체를 살아가니 잘못된 이름이지

언제부터였든가 보는 사람의 눈길따라

천사와 위선자란 이중 대명사

한 걸음 첫 디딤에 긴 세월 쌓아 올린 혼신의 탑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 탑 이름

아 크고 푸른 이름이여

지쳐 쓰러지는 아픈 이름이여

이 시는 2004년 2월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은퇴한 조병기 신부님이 고별강론에서 인용한 ‘신부란 이름’이라는 시입니다.

평생을 사목자로 살다가 무대를 떠나는 사제의 심경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시라고 할까요. 듣는 이나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38년 전 저는 흰 장백의를 입고 제단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서 사제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주님, 이 질그릇같이 볼품없고 부족한 저를 당신 일꾼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한 몸 바쳐 당신과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열심히 살며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한없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려 쩔쩔 매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제 사제의 공적직무를 마무리 하는 오늘 또 한번의 눈물어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흘리는 눈물은 많은 우여곡절과 유혹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이렇게 사제로 남아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너무나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왔기에 하느님과 내가 만남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은 지난날의 회고와 반성, 은퇴 후의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거룩함을 주는 훌륭한 사제이기보다는 나의 이(利)를 쫓아서 정신없이 헤맨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가책감이 듭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영적인 아버지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성숙한 인격으로 형제자매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나름대로는 사제의 직분이 이웃들의 눈치나 살피고 인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니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타고난 급한 성격과 직선적인 언행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준 삶이 아니었나 깊이 반성해 봅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이 사제의 본심을 이해하면서 따라주기 보다는 없는 일도 지어내거나 과장하여 비방하고 헐뜯는다고 생각될 때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고 그들을 향한 서운한 감정과 함께 맞서보고 싶은 충동으로 괴로움을 겪기도 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제게 상처나 서운한 감정을 주신 분들을 모두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면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련하여 주신 제 사제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비록 누더기처럼 얼룩진 부분이 많은 저의 삶이지만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선물로 봉헌하고자 합니다.

신부님은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중국고사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강론을 끝맺었습니다.

-저는 옛날이야기만 하는 노인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과거보다는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선물을 더욱 좋아하십니다.

이제 좀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훨훨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제가 한 사제의 은퇴강론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그 사제의 삶이 바로 신부님들이 본당사목을 하면서 겪어야 할 애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삶을 거울삼아 보람되고 멋진 사제생활을 이어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예레 23,4)